본문 바로가기
말씀과 나

위의 것을 찾는 삶 (골로새서 2장 20절 ~ 3장 11절)

by 더좋은소망 Pastor 2022. 12. 8.

위의 것을 찾는 삶
(골로새서 2 20 ~  3장 11)


저희 중에 세례를 받지 않은 분들은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든지 세례를 받기 때문인데요.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받아야만 하는데 세례를 받은 것만으로 그리스도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례를 받고도 옛 사람인체로 살아간다면 그가 기독교인으로써의 세례 교인은 됐을지언정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로 많습니다.

저도 그러했었는데요. 저는 태아일때부터 교회를 갔었는데요. 흔히 이런 사람들을 모태교인이라고 하는데 저도 모태교인이었습니다. 장로교에서는 유아세례 아니면 입교 세례를 받거나 하는데 저는 순복음 교회에 다녀서 침례를 받았습니다. 중3 때즈음 받았었는데요. 교회를 잘 다녔기 때문에 침례도 받을 때가 돼서 침례를 받았었는데 그렇다고 인생이 확 달라지거나 마음이 달라지거나 그런건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의 수많은 청년들 특히나 군대를 다녀온 청년들도 대부분 군대에서 진중 세례를 받아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이 많을텐데 그 청년들이 전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기독교 신앙은 늘 현재가 중요하지 과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내가 기독교인으로써의 정체성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느냐 그렇지 않느냐만 있을뿐입니다.

[ 전에 그 가운데 살 때 ] (3:7)

 지금 이 편지를 읽는 골로새 성도들도 성도이기 때문에 복음을 듣고 믿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골로새 교회에는 어떤 사상이 팽배했냐면 미신이 팽배 했던것인데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냐면 골로새서 2장 18절 말씀입니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 숭배를 이유로 너희를 정죄하지 못하게 하라” 당시엔 악한 영들에게 보호를 받기 위해서는 천사들을 불러내어 천사를 숭배해야 한다는 사상도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조장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것도 2장 18절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가 그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 여기서 그는 어떤 사람인데 그 사람이 본 것이 어떤 것인지는 바울이 말하고 있지 않지만 어떤 사람이 무엇인가 봤다고 하면서 그것을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말하고 다녔던 사람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유튜브를 보면 이런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뭐 천국 간증, 지옥 간증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든지 궁금해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리를 자신이 마치 천국을 본 것처럼 지옥을 본 사람처럼 말하고 다니는데 그것을 진짜 봤는지 아닌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잖아요? 바울은 지금 당시에 골로새 교인들을 현혹했던 바울이 아닌 어떤 사람으로 인해서 골로새 교회가 문제를 겪고 있을 때 2장 18절 말씀처럼 “그가 본 것에 의지하여 그 육신의 생각을 따라 헛되이 과장하고”라고 말했는데 결정적인 이유는 ‘머리’ 곧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이죠.

 그러한 사람들로 인해서 또한 유대주의자들 때문에 골로새 교회는 여러 문제를 겪고 있었는데 그 말씀이 본문 2장 20절 말씀입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골로새 교회 안에는 복음을 들었지만 초등 학문과 같은 규례 즉 유대 전통이나 율법에 얽매이던 사람들도 있던 것입니다. 그렇게 유대주의 율법주의에 얽매여 있던 사람들은 23절과 같이 어떤 천사를 숭배하거나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 이런 생각의 영지주의에 기반한 금욕주의가 팽배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바울은 그러한 사상이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골 2:23)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날로 가져와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주신 성(性)은 거룩한 것인데 그것이 하나님 안에서만 거룩해지는 것인데 그것을 오용하는 사람들이 왜곡해서 그것을 문제의 한 가운데 두고는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제도인 결혼, 부부사이에서 부부관계를 해도 그것을 악하다고 여기거나 했던 것이죠. 그뿐만 아니라 몸을 괴롭게하면 영은 더욱 하나님과 가까이 한다는 의식이 있었는데 그것이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데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지는 것과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는 것을 말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예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받아서 은혜로는 사는 살아야하는데 그것의 표징이나 현상은 죄를 끊으며 사는 것 죄를 멀리하는 것인데 죄를 멀리하기 위해 그것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엄격한 잣대를 자신에게 가하는 것 그것 또한 몸만 괴롭게 할뿐 육체를 따르는 것을 금하는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다고 한 것입니다.

좀 더 쉽게 말씀드리자면 내 아이가 컴퓨터 게임이나 게임기 게임 콘솔 게임을 너무 많이 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은 것 같아서 제한을 했더니 오히려 스마트폰을 들고는 부모 몰래 그것에만 집중하는 것과 비슷한 양태가 골로새 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골로새 교회에게 바울은 뭐라고 말했냐면

[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 (3: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골 3:1) 라고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정말로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예식이며 표식인 ‘세례’를 받은 사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유혹이 있거나 육체를 따르는 것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따르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때에 어떤 유익한 어떤 것을 찾는다면 무엇을 찾으라는 것이냐면 ‘위의 것’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그 ‘위의 것’이 무엇입니까? 그 ‘위의 것’은 3절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이라는 것이죠. 그러니까 바울은 골로새 교회 안에 있는 성도를 다 같은 성도로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성도는 유대주의 금욕주의 영지주의에 빠져 있는 것으로 본 것이었구요. 그런 사상이 팽배해질 때 규례를 지킨다거나 또 어떤 금욕행위를 한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궁극적으로 현재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4절 말씀과 같이 나타나실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속한 그 생명을 찾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 나타나실 그 때 ] (3:4)

 바울은 이어서 그렇게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감춰져 있는 생명을 찾으면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그와 함께 우리의 생명도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는데요.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날 생명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말하는데 그 말씀이 본문 3장 5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무엇을 죽이라는 것이냐면 땅에 있는 지체 육신에 속한 나의 지체를 죽여가는 삶이 위의 것을 찾는 사람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나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나는 사람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인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어떤 욕구를 금하거나 하는 금욕주의와는 다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는 그것을 죽이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과 같은 것들입니다. 이것이 앞서 바울이 23절에서 언급했던 육체를 따르는 것인데 천사 숭배나 규례를 따른다고 해서 죽일 수 있는 ‘음란’이나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을 죽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무엇과 관련이 있는 것이냐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는 것은 곧 어떤 것을 추구하느냐 찾느냐와 관련된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그러니까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 안에서는 성도가 된 후에 죄와 분투하는 성도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어떤 사람은 “악한 영의 공격으로부터 지켜주는 천사를 숭배해야 한다”거나 “율법 규례를 잘 지켜야 한다”라고 주장했던 것에 반해 바울은 천사를 숭배한다고 해서 율법 규례를 잘 지킨다고 해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으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의 참된 생명이 감추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제나 죄는 저희 곁에서 나를 삼키려고 도사리고 있는데 그것과 멀어지려면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면 생명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어떤 생명을 추구하라는 것이죠? 그리스도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는 그 생명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어떤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냐면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날 참 생명을 바라는 사람인 것이죠.

 바울은 왜 그런 삶을 살아야 하냐면 7절 말씀과 같이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살았었기 때문에 위의 것을 찾지 않으면 다시 그렇게 살게 되기 때문에 위의 것을 찾는 삶 그 위의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감추어져 있는 생명인데 그 생명을 찾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쉽게 우리에게 입혀지는 것을 벗어 버려야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8절 말씀입니다. ‘분함’, ‘노여움’, ‘악의’와 같은 감정적인 것들이고 또한 숨은 의도와 같은 것입니다. ‘비방’,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과 같은 언어적인 것들이 우리에게 쉽게 입혀지는 땅에 있는 지체들이 입고 있는 것인데 그것을 “벗어 버리라”라고 말했던 것은 의지적으로 그것을 털어버리라는 것이죠. 내가 내 감정에 휩쓸릴 것 같은데, 더러운 언어가 나올 때 나의 의지로 그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냐면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은 8절과 9절의 감정적인 것 언어적인 것들이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 ‘옛 사람과 그 행위’인데 그것을 벗어 버리라는 것입니다.

 10절은 왜 그래야만하는지를 설명하는데 그 이유는 ‘새 사람’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인데 그 형상이 어디까지 맞닿아 있다고 말하냐면 “창조하신 이의 형상” 그러니까 골로새서에서 형상은 골로새서 1장 15절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을 따라 새롭게 된 사람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그 의식이 그리스도와 닿아야 하기 때문에 옛 사람을 의식적으로 벗어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위의 것’은 무엇이냐면 ‘그리스도’와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인데 그 생명은 11절과 같이 거기에 있는 생명이구요. 땅에 있는 지체들이 천사 숭배나 절기나 초하루, 안식일과 같은 규례를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너는 ‘헬라인’ ‘유대인’, ‘할례파’, ‘무할례파’ ‘야만인’, ‘스구디아인’ ‘종’, ‘자유인’과 같이 내가 너와 다르다는 어떤 차별을 짓는데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차별이 없으며 ‘그리스도’는 위에 계실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만유’시며 즉 ‘모든 것’이며 ‘모든 것’에 계시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즉 바울은 그리스도인이라면 본 것에 의지하는 삶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는 삶으로써 또한 이 세상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의식함으로써 새 사람을 입으면서 의지적으로 이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은 감정과 언어를 멀리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답게 살려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냐면 위의 것을 찾는 삶 추구하는 것이 땅에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이 세상에서 땅에서 살지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면 의식적으로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위의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하나님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죠. 즉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불쑥 불쑥 땅에 속한 지체를 마주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하는 것은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구요. 위의 것을 생각하는 것이구요. 위의 것을 찾는 것입니다. 저희 모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면 늘 위의 것을 찾으므로써 새 사람을 입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지식이 새롭게 하심을 입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살아가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