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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차단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 (벧후 2:10-22) 이단 경계, 주의, 분별

by 더좋은소망 Pastor 2022. 6. 26.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
(베드로후서 210~ 22)

  본문 이전에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2장에서 이단이 원래 그리스도 안에 있던 것이 아니었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가 않습니다. 이단은 교회 밖에 있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길거리에서 역 앞에서 학교 앞에서 밖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은 똑같은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에 분간하기가 어렵습니다.

 베드로가 쓴 이 편지를 읽는 독자들에게 이단이 어떻게 들어왔는지를 말하였는데 그 말씀이 베드로후서 21절 말씀입니다. “그러나 백성 가운데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그들은 멸망하게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라고 말했습니다. 1절과 같은 유형의 이단은 오늘날로 보자면 재림주, ‘재림 그리스도’, ‘약속의 목자니 하면서 유대인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유형의 이단입니다.

 이단은 백성들 당시 살아있던 사람들 중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단이라고 말하는 그 이단과 당시 이단은 좀 다릅니다. 현재 각 교단, 총회에서 이단 규정을 할 때에는 집단또는 교회’, ‘선교회의 대표자를 이단이라고 말하지만 그래서 사람들을 이단이라고 말하지만 초대 교회에 이단자체는 무엇이에요? ‘가르침’, ‘교훈입니다. 베드로는 그걸 누가 끌어들였다고 말했던 것입니까? 거짓 선지자들이, 거짓 선생들이 끌어들였다고 말한 것이죠. 끌어 들였다는 것은 이단자체는 원래 교회 밖에 있었던 것인데 백성중에 있었던 것인데 소위 거짓 선지자들, 거짓 선생들로 불렸었던 그들이 교회 안으로 이단을 끌어 들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집단이 있는데요. 한국기독교총OOO가 그런 역할을 합니다. 거기에는 여러 교단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여러 집단, 교회, 목사가 가입해 있는 단체인데 그 단체는 이미 이단들의 세탁소가 되고 있습니다. 교단에서는 이단으로 이단성으로 규정된 그 집단, 인물의 가르침이 비성경적이고 전통적이고 정통적이지 않아서 이단이나 이단성이 있다고 규정했는데 어디서 받아주냐면 한국기독교총OOO에서 받아주어서 마치 거기에 가입된 것만으로 정통인것처럼 어필을 합니다. 문제는 그들은 이단이어서 교회의 집합체인 교단 밖에 있었던 존재들인데 가만히 끌어들인 것입니다. 그것처럼 2,000여년 전에도 교회 밖에 있었던 가르침으로 존재했던 이단들을 가만히 끌어 들인 존재가 그들이 스스로 권위있다고 여겼던 거짓 선지자들’, ‘거짓 선생이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러나 그들이 교회안으로 들어왔다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가족들 뿐만 아니라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시키실 때에 건짐을 받은 롯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9절과 같이 말했던 것입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에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아무리 이단이 교회안에 들어와도 하나님께서는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져주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이 있는 심판날까지 심판을 유보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키시는 경건한 자는 어떤 사람일까요? 본문은 어떤 사람이 경건한 자인지는 말해주고 있지 않지만 어떤 사람이 불의한 사람인지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의한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활동하고 있는지는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의한 사람들의 특징을 알려주기 위해 본문을 쓴 것입니다.

[ 2000여년전 이단의 모습들 ]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쓸 당시의 이단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들은 육체를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육체를 따랐다는 것은 성령을 따른 것이 아니고 자기의 욕심을 따라 살았다는 것입니다. 욕심을 따랐다는 것은 하고 싶은 욕구대로 살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실 누구든지 욕심은 있잖아요?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데 갖고 싶은거 그것 욕심이죠. 그런데 그것을 절제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신데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사역이 육체를 거스르는 것이라고 말했는데요. 함께 읽겠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라디아서 5:17) 사람의 육체에서 원하는 것들은 나오는 것들은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었습니다. 마태복음 511절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 성령께서는 이성을 찾게 하십니다 ]

 그 당시 이단들이 육체를 따랐다는 것은 성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죠.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의 모습은 마치 이성이 마비된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본문 12절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뿐만 아니라

 오늘날 베드로후서 2장의 맥락안에서 이단들을 보면 본문을 포함하고 있는 이단들에게서 어떤 특징이 나타나냐면 잡힌다는 것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말한 본문 12절에서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라는 구절의 의미가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짐승을 뜻하는 것인데 이성 없는 짐승이 잡히는 것처럼 이단들도 또 이단에 준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보면 잡힙니다. 어디로부터 잡히나요? 경찰이나 사법부로부터 잡힌다는 것입니다.

 제가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이단이 있는데 그 이단은 만민OO교회입니다. 올네OO스교회도 이쪽 계통에서 파생된 이단입니다. 교주는 이재록이죠. 성폭행 혐의로 지금 형량을 살고 있는데 사실 그런데 이재록이 교주여서 형량을 산 것이지 피해자는 당연히 보호를 받아야 하지만 과거의 신도들은 MBC 사옥에 난입해서 난동을 부리기도 했습니다. 이성을 잃었던 것이죠. 성령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JMS로 알려진 정명석도 마찬가지죠. 8년만에 중국에서 잡혔던 정명석도 끔찍한 성범죄를 저질렀었습니다. 그러나 형량을 다 살아서 출소했는데 지금도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해서 올해 3월에 피소를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단으로 규정된 것은 벌써 수십년 전인데 문제는 이단이 아닌 정통 교단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 충동을 절제하거나 피하게 하시는 성령님 ]

 사실 누구나 충동을 느끼죠. 그런데 그것을 절제하게 하시거나 피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신데 그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습니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마치 싸움이 났을 때 신고하거나 피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해야 정상인데 그냥 구경만 하거나 핸드폰으로 촬영하는 그런 사람들인거에요.

 베드로는 그 당시의 이단들의 특징 중 하나가 무엇이냐면 12절 말씀에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 누구나 쉬거나 놀수는 있는데 그것을 기쁘게 여기는 그 태도를 점과 흠이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노는데 어떻게 노냐면 속임수로 즐기고 놀았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를 속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에요.

 그리고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14절에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이러한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혈기왕성한 30대 목사 소위 정통 교단 아버지까지 목사인 신앙의 뼈대있는 가문의 아들 목사가 그루밍 성범죄를 일으켜서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만드는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를 속이는 이단은 독버섯같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 외면적 이단과 내면적 이단 ]
 
 이러한 외면적 이단 또한 내면적 이단들은 우리 사회에 또 정통 교회 안에서도 많은데 그들은 그렇게 교회에서 사역’ ‘주의 일을 하면서 교회에서 받는 사례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사실 어떤 일이든 해서 삯, 임금, 봉급, 월급을 받는 것이 불의는 아니죠. 노동의 댓가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 이단들을 베드로가 살아있을 당시에나 지금에나 그러한 부류의 이단들을 가리켜 베드로는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라고 이 편지를 읽는 저희들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단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존재하는데 그들의 특징은 스스로를 속인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속이면서 미혹하면서 얻는 삯을 마치 정당한 노동의 댓가로 여긴다는 것이구요. 그래서 그것을 베드로는 불의의 삯이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이단이나 이단성 시비에 걸려 있는 사람들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들은 기존의 교단, 교회에 있다가 성장하니까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스스로가 법이 되어서 뛰쳐나간 후에 자신들이 더 옳다고 하구요. 극단적으로는 자신들이 다니는 교회에 이름이 있어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교적부를 보이지 않는 생명책과 같이 여깁니다. 그러한 목사, 전도사, 교회가 신자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외부에서 다수가 그거 아니라고 말해도 책망해도 그것을 듣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그러한 사람들은 마치 발람을 저지했던 나귀처럼 그 나귀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저지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사신 그 백성들이 그러한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곳 발람을 저지한 나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사람들과 매스컴을 두셔서 그들의 실상을 낱낱이 드러나게 하셔서 거긴 아니라고 거짓에 가까이 하지 말라고 사인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베드로는 이 사람들을 어디에 은유하냐면 물 없는 샘’,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라고 말했는데 물 없는 샘이라는게 있을수 있나요? 샘에는 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샘에 물이 없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의 가르침은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와 같다고 말하는데 영적으로 유익하지 못했던 이단들의 가르침을 뜻하는 표현입니다. 마치 투명 페트병을 멀리서 봤는데 어? 저거 생수통이니까 물이 있겠네? 했는데 없는겁니다.

 오늘날 이런 가르침을 주고 받는데가 수두룩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을 믿는 것 믿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이야기해주기보다 단어에 집중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신O지교의 비유 풀이안상홍교(하나O의교회 기존 교회의 절기 비판, 구원파의 지속적인 회개를 거부하는 설교, 여호와의OO교의 완전히 어긋나버린 기독론과 내세관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한 이단들의 역사는 짧게는 수년에서 1020, 오래 되면 50년 더 오래되면 1002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 그 가르침이나 교리들은 신선해보이고 새로워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2000여년전에 있었던 이단들의 가르침을 조금더 현대적으로 탈바꿈한 것에 불과한 것인데 그러한 이단들의 가르침은 들어도 들어도 영적 유익이 없는 물 없는 샘이며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라고 말한 것이고 그들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것은 광명한 천국이 아니라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허탄한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교육 받은 것을 자랑처럼 진짜 복음처럼 말하는데 그 결말과 믿음의 대상이 교주임이 뻔히 알면서도 그것이 진리인것처럼 자랑하며 말들을 토해내니 정상적인 이성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듣다보면 안타깝습니다.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 이단도 있다고 말하는데 그때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JMS 기독교복음O교회 같은 단체가 특히나 이런 유형의 이단입니다. 뿐만 아니라 정욕그러니까 욕구를 채워주기 위한 이단들도 있다는 것인데 안식교와 같은 경우는 내부 행사가 아닌 대외적으로 모바일 성경 퀴즈 게임 어플리케이션으로 대회를 주최해서 에어팟 프로 같은 고가의 상품으로 다른 사람의 필요를 건드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더라도 그들은 멸망의 종들이며 그들은 이미 누군가에게 진 사람들이고 진 사람들은 이단들의 종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이단들의 특징을 보면 상하 관계가 뚜렷합니다. 역할이 아닌 상하관계가 뚜렷하죠. 신O지 같은 경우는 교주 이만희가 있고 이만희 밑에 지파장이 있으며 지파장뿐만 아니라 강사가 있습니다. 서로 명령과 복종의 관계입니다. 지령이 떨어지면 온갖 네트워크를 동원해서 마치 북한의 열병식과 같은 카드섹션을 펼치는 독재자가 군통수권인 나라 북한의 국민들과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이단들에게 얽매인 사람들은 그 안에 예수 이름을 있어서 죄 용서함을 받는 것처럼 구원이 있는 것처럼 복음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만 세상의 더러움그러니까 세상 죄를 피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가르침 자체가 물 없는 샘,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단에 얽매인 사람들은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할 것이라고 베드로는 예고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렇게 교회 안에 들어온 이단들이 의의 도를 알았었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것들이 더 새로운 것 같고 더 맞는 것 같지만 그들의 가르침으로 받은 것은 차라리 그 이단들을 알지 못하는 것이 그들에게 더 나은 것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렇습니다. 종교, 이단에 잘못빠지면요. 무교인들보다 못한 삶이 되어버립니다. 신앙심으로 충성심으로 헌금을 하는데 가정이 뒷전이 되고 관계가 뒷전이 되는거에요. 처음 형편은 괜찮았는데 기독교 이단에 잘못 발을 들이니까 나중 형편이 어떠냐면 처음보다 더 심한 상태 교리를 몰랐던 때보다 더 못한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가정을 보면 가족 단위로 빠진 사람들 외에는 온전한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고 가정이 조각나버리고 자식들은 가출하고 그런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진리, 교리를 잘 몰라서 죄에 대해 아무런 감각과 생각이 없었던 때보다 이단에 빠진 나중 형편이 더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21절에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리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단에 미혹된 사람들 가정이나 개인 경제나 파탄난 사람들을 가리켜서 22절과 같이 말합니다.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베드로의 이러한 속담, 비유는 역시나 예수님의 수제자로써 예수님께 들었던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마태복음 7:6) 거룩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이단들은 그 거룩한 것을 자신들의 교리에 맞게 짜맞추는데 그것 자체를 믿는 사람들이 개가 토한 것에 돌아가는 것 돼지가 씻었다가 다시 더러운 구덩이에 누운 것처럼 이단들이 그런 상태임을 말한 것입니다.

[ 본문을 교회에 쓴 베드로의 기록 의도 ]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이단들은 그런 상태인데 베드로가 이 편지를 쓴 이유는 그들은 그러하더라도 이 편지를 읽는 저희들은 그런 상태가 되지 말라는 것이죠. 그들의 상황을 보라는 것입니다. 가정이 깨지고 삶의 일부분을 잃어버리고 빼앗긴 그들을 보며 교훈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분별력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내 삶에서 반복되는 죄의 습관들이 있다면 그것을 회개하고 또 그 죄를 짓지 말고 마치 개가 토하였던 것에 돌아갔던 것처럼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누워있는 것처럼 더러운 죄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본문을 읽으면서 이건 이단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니 너희는 괜찮아 이건 베드로의 기록 의도와 목적이 아니구요. 그들을 보면서 분별력을 가지고 너희는 그들처럼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베드로가 본문을 썼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단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이단에 미혹되지 않으려면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들 안에 있는 열매를 보면 아는 것이구요. 안상홍교와 같은 이단들이 아무리 사회적인 선행과 캠페인을 벌인다 하더라도 거기서 믿음의 대상이 되는 안상홍과 장길자 같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둔갑 되어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단을 분별할 수 있기도 합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은 무엇이 이단인지 무엇이 정통인지 잘 구분함으로써 결코 그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않게 되기를 주께서 시험에서 건지실 때 건짐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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